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조(조선)/생애와 업적 (문단 편집) === [[엄친아]] ===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노력하는 천재]].''' 각종 기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느냐?"'''며[* [[세종대왕]]도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반박할 때 이렇게 응수한 적이 있었다.]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조선판 [[팩트폭력]]~~ 실제로, 정조는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 하겠다|"내가 더 이상 경들에게는 배울 것이 없으니 내가 직접 교육을 해야겠다."]]'''라면서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하고, 임금 자신이 '''직접 교육을 시켜서 중하급 관리들을 발굴'''하는 [[초계 문신제]]를 실시한다. 또한, 실록에 보면 신하들에게 "공부 좀 하시오."같은 [[엄마]] 같은 잔소리 멘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같으면 경연 폐지는 "그것만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해야 할 일이긴 한데, 그게 엄친아 정조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진짜 신하들로서는 주눅 드는 학문적 포스를 가진 정조 앞에서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무식하다고 갈굼 당할 테니까 말이다. 대단한 [[독서광]]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사관이나 승지들이 적절한 인용구를 못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으면 정조는 "어느 책 몇 쪽 몇 번째 줄에 뭐라 되어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인용이다. 어느 책의 몇 쪽에 몇 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있으니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그대로 옮겨 적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신하들이 교차 확인할 겸 직접 원문을 찾아봤는데, '''왕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이런 사례는 서애 류성룡이나 율곡 이이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조가 신하들과 다르게 군주로서 일하는 입장이라 다른 업무로도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는 바쁜 사람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근본적으로 조선 시대 왕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왕이 '''모든 경서를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정조다. 이유는 후술 하겠지만 정조는 자신이 그 책을 암송할 때까지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철학자)|주자]]의 저서나 기타 저서에 자신이 새로 주석을 다는 등 자신의 집필서를 묶어서 [[홍재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미 동궁 시절 때부터 [[주자대전]], [[주자어류]]의 선집인 [[선통]], [[화선]], [[회영]]을 엮어내었고, 이후에는 주자가 평가한 [[두보]]와 [[육우]]의 시를 모아 [[두육분운]], [[두육천선]]을 엮었으며 말년에는 [[아송]]을 펴내는 등 시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특히 주자의 저서에 자신의 주석을 달았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당대의 [[네임드]] 유학자 [[윤휴]], [[박세당]]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설령 임금이라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아무런 이야기 없이 출판까지 제대로 거친 것은 당대에 정조의 학문적 성취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본인]] 스스로가 조선의 학통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할 정도면 이단이라 욕할 수도 없다.]. 경연 과정에서 정조가 밝히는 유학에 대한 소견에 있어서 당대의 학자들치고 제대로 받아치거나 혹은 반론을 제기한 경우가 없다. 근본적으로 정조가 시행한 [[초계문신제]] 자체를 봐도 전례가 없는 제도로써, 이러한 제도 자체에 신하들이 완전히 제동을 걸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정조의 유학적 소양이나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서학]]에 대한 견해 자체도 정약용의 저서를 읽어보면, [[문체반정]]을 일으킨 이유를 모를 정도로 개방적으로 나온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그런거다.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이 갑인데 갑으로서 다 해봤더니 별거없더라...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는 조선의 왕이며 초특급 유학자였던 거다. --특히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 능력 자체는 후대 사람들보다 빠르고, 이해력도 높아 아주 적극적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문체반정]]에 대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문체반정]] 자체는 유교 근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소장파, [[남인]] 계열에서 [[서학]]이 유행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강조하는 측면으로써의 [[문체반정]]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세워 사학을 물리친다는 정조의 기본 방법론은 주로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인 계열 그리고 후에 [[시파]]로 분류되는 파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이들은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다. 이러한 문체 반정과 정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방법을 통해 정조 연간에는 [[진산사건]]을 제외하면[* 그나마 보면 이건 정조로서는 처벌을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극렬한 서학 탄압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실질적으로 문체 반정 과정에서 [[이가환]], [[김조순]] 등이 사실상 정치적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홍재전서]] 중에서는 '''옥편'''도 있다. 즉, [[훈고학]]이나 [[고증학]]에 있어서도 달인이었다. 임금이 쓴 책이라고 다 출판해주는 게 아닌 조선의 깐깐한 출판 구조와, 임금이 쓴 책이라도 엉망이면 신하들이 미친 듯이 깠던 성리학적 전통을 고려하면, 옥편까지 나온 시점에서 정조의 학문적 달성의 수준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신하들이 '''아 우리 임금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셨다'''라고 묘지문(墓誌文)을 적은 경우가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정조 밖에 없다.[* 정조의 묘지문의 맨 끝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왕은 성인이셨다.'][* [[송시열]]이 [[효종(조선)|효종]]을 성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두고 일반적인 표현이라 할 수는 없다. [[현종(조선)|현종]] 초에 [[송시열]]은 [[예송논쟁]] 과정에서 [[체이부정]]을 언급하여 [[효종(조선)|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고 있었다. 이후 송시열이 [[기유독대]]를 공개하는 등의 맥락에서 본다면 일반적으로 보기 어렵다..] 심지어 20자로 휘호를 정해 오지 않았다고 신하들을 면박을 주고, [[세조(조선)|세조]]라는 시호가 왜 안 되냐고 신하들을 '''협박한 [[예종(조선)|예종]]조차도''' 자신의 부친인 [[세조(조선)|세조]]의 묘지문에 성인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고[* 당연하겠지만 [[세조(조선)|세조]]가 성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짓을 한 건 아니다.], 그 이전에 [[세종(조선)|세종]]도 그렇게 쓰지 못했다.[* 단, 이건 묘지문에 한정한 경우고,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서문을 보면,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라는 구절이 나온다. [[세종(조선)|세종]]에 대한 당대 신료들이나 지금의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식은 군자를 넘어 성인의 그것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학문적 업적을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정조의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보다도, [[세종(조선)|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훨씬 값지고 빛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조(조선)|정조]]가 유일무이한 셈.[* [[고려시대]]로 넘어가면 [[현종(고려)|현종]]때 신하들의 묘비석이나 [[현화사비]]에 '''"우리 임금은 성군이시다"'''라는 문구는 확인 할 수 있다.] >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백성은 먹을 것 없이는 있을 수 없으니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그러니 '''군주는 모름지기 군주의 하늘인 백성을 잘 섬기고,''' 백성의 하늘 또한 잘 섬겨야 한다.[* 앞의 말은 [[정조(조선)|정조]]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이전부터 비슷한 말이 있었다.] > 경연 신하가 백성이 상언하여 격고하는 것이 근래에 매우 외람되고 잡스럽다고 하자 하교하길 '''불쌍한 저 고할 데 없는 백성들이''' '''가슴에 깊이 원한을 품고도 스스로 현관에게 아뢸 수 없어 분주히 와서 호소하는 것이니,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다.''' '''저들은 실로 죄가 없다. 그렇게 만든 자들이 죄인이다.''' 또한 [[일득록]]에서 [[정조(조선)|정조]]의 독서광 성격이 잘 드러난다. > 상이 말하길 요사이에 읽는 책이 어떠한 것이 있느냐? 라고 하자 신하들이 바빠서 읽는 책이 없다고 하자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 '''[[맹자|이는 하지 않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공무를 보느라 여가가 적기야 하겠지만, 하루에 한 편의 글을 읽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과정을 세워 날마다 규칙적으로 해 나간다면 일 년이면 몇 질의 경적을 읽을 수 있고, 몇 년 간 쉬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간다면 칠서를 두루 읽을 수 있는 것이다.'''--내가 할수 있다고 남에게도 할수 있다고 강변하기.-- ~~교과서 중심으로 잠은 충분히 같은 이야기다.~~ 라든지 > '''작년에 보지 못했으니 올해는 두 번 세 번 본다.''' > '''무릎을 치면서 책을 읽으면 악기 연주하는 것 못지않게 흥겹다.''' 등의 기록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원체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찾아가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떻게 읽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책거리를 하는 것이 사실상 월례 행사가 되었다. 바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 질을 읽었다고 하니 현대로써든, 당시로써든 희대의 [[독서광]] --[[문자 중독]]-- 이었던 셈. 하지만 비판이 업이었던 [[대간]]들에 의해 황당한 비판을 당하기도 했는데 [[유성한]]이란 자가 "아무리 신하가 못났다 해도 경연을 소홀히 함은 옳지 못하며, 요새 듣자 하니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다고 하니 남부끄러워서 일 못해먹겠네요"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604018_003|정조 실록 34권, 정조 16년 4월 18일 병진 3번째 기사]].] 정조는 이 상소를 읽고선 "첫 번째 건은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두 번째 건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올 정도다. 관둘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해"라고 소감을 밝혔고 신하들이 "저 미친놈이 돌아도 단단히 돈 모양입니다."라고 일제히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엔 상소도 올리지 말라 명한다. 허나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남인]]들이 일제히 [[유성한]]의 배후를 캐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사한 결과 [[유성한]]이 [[윤구종]]이란 자와 친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그가 [[경종(조선)|경종]]의 무덤 앞에서 예를 표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종(조선)|경종]]에게 신하 노릇을 할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경종(조선)|경종]]이 폐주도 아니고 엄연히 [[영조]] 자신도 황형이라 칭송한 어엿한 조선의 임금인데 자신이 악질 역적임을 자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요약하자면 '나 제발 죽여주세요'라고 빈 셈이다.] 그러자 [[채제공]]이 "[[경종(조선)|경종]]께선 4년간 조선의 임금이셨는데 경종께 충성하지 않는 놈이 [[영조]]께는 충성했겠고 [[사도세자]]께 충성하지 않은 놈이 전하께는 충성하겠습니까?"라고 곁다리로 [[사도세자]] 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나중에 다른 이는 아예 본론으로 [[사도세자]] 얘기를 꺼낸다. 이에 호응하여 [[사도세자]]를 추숭할 것을 청하는 [[영남만인소]]가 올라와 [[김종수(조선)|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를 두렵게 했다. 이에 정조는 큰 호응을 보였으나 [[5.22 하교]]란 하교를 내려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게 맞긴 하지만 시기 상조니까 그냥 덮어두자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후 [[채제공]]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도세자]] 추숭에 승부수를 걸었다가 정조 말년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하지만 [[채제공]]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왕이 추숭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이 마음을 [[채제공]]이 눈치는 챘지만 좀 앞섰다고 하는 게 좀 더 옳을 듯하다. 실제로 승부수를 걸었을 때 [[김종수(조선)|김종수]]가 "아니 [[5.22 하교]]를 들은 신하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영조|선왕]]이 [[채제공]]에게 금등을 내리셨는데 상소의 구절 중 하나가 그 금등 안에 있던 어서에 있던 문구였는데 지금 죽기 전이니 진실을 얘기한 거다."라며 처벌을 내리는 데에 적극 반대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를 익혀서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추었다.[* [[정조(조선)|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병서와 무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게 죽음을 부르기도 했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다른 점이 [[사도세자]]와는 달리 문, 무 모두 능통했다는 점] 덕분에 일부 야사에서는 초기 [[장용영]]은 [[정조(조선)|정조]]가 각 지의 고수들을 직접 때려잡아서 모집한 부대란 말도 있다. [[파일:정조대왕궁술.jpg]] 해당 자료는 [[고풍]]에 관한 것인데, '고풍'은 원래 조선시대 때 새로 부임한 관료가 하급자에게 공식적으로 선물을 내려준 과정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정조(조선)|정조]] 때는 이렇게 활쏘기 이벤트를 통해 기분 좋아졌다는 핑계로 새로 부임한 상급자 관리가 하급자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musenet.ggcf.kr/archives/artwork/%ea%b3%a0%ed%92%8d?term=44|참조]]] 해당 자료는 활쏘기 이벤트 후 기분이 좋아진 [[정조(조선)|정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정조(조선)|정조]]는 고풍 서류가 올라오면, 직접 [[수결]]을 하여 결재했고, 간단한 감상이나 신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적거나, '누구 누구에게 이런 선물을 내린다'는 식으로 추가로 기록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고풍 자료에는 "원래 활쏘기는 [[이성계|우리 가문의 법도]]인데 이후 10여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힘을 시험해보려고 몇차례 10순씩 쏘았는데 40여발씩 명중시켰다. 그랬더니 경(신하)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그래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때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10월30일)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49발)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고 적혀있기도 하다. 이러한 정조의 고풍은 여러 장이 남아있는데, 하나같이 '20순 중에 98발 명중', '10순 중에 49발 명중' 이런 결과가 쓰여있다. 참고로 1순은 5발, 20순은 100발이다. 위 기록에서 보듯 [[활]] 솜씨도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100발을 쏘면, 98발, 50발을 쏘면 49발씩 맞히고, 나머지 한두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 스스로도 이를 두고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고,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조 때 실학자인 [[박제가]]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임금의 활쏘기 솜씨에서 50대 중 1대를 빠뜨린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고 하더라'고 기록하며 '문무를 겸비한 우리 성상(정조)은 백왕을 뛰어넘으셨다'며 칭송하기도 했다. 심지어 정조는 [[곤봉]]에 놓고 쏘아 10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기도 했다. 세손 때 쏘고는 즉위 후 16년간이나 놓았는데도 50발 중 41발을 맞히었고 한번 49발을 맞힌 이후로는 어김없이 49발을 맞혔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이성계]]의 현신'이란 말도 나왔을 정도로 [[문무겸비]]의 왕이었다. 참고로 이성계는 '''[[제1차 요동정벌|실전]]에 70명을 연속으로 [[헤드샷|머리를 맞혔다고]] [[고려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사실, 비단 정조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왕들은 이성계의 후손답게 명궁이 많았다. 성격은 자상하기보단 [[다혈질|성질이 불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같다기보단 더럽다에 가깝지만][* 물론 그래도 [[의빈 성씨]]에게 대한 태도 같은 걸 보면 은근히 로맨틱한 기질이나 자상한 성격도 지녔던 듯 하다. 물론 여기서도 두 번째 프로포즈에 실패하자 의빈 성씨의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하는 불같은 성격이 드러난다.][* 다만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으면 받았지 눈 밖에 난적은 거의 없었다. 영조의 사람 재는 기준이 깐깐하다 못해 병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자기 조절과 처신이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애당초 정조의 생부인 사도 세자가 왕의 정통 후계자임에도 비참하게 죽은 것은 영조의 병적인 결벽을 견디지 못해 엇나간 것이 큰 이유였는데, 그런 영조 밑에서 20년 이상을 총애받은 정조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내내 궁궐에서만 산 것이 아니라 사도 세자가 죽은 뒤에 청소년 시기는 [[홍봉한]]의 집에서 오래 지내었다. 2009년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심씨 문중에서 모아 보관해온 어찰첩에는 정조의 불같은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다.] 이 불같은 성격이 엄친아적인 능력과 결합되면서 [[말빨]]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조 역대 국왕 중 언쟁 능력은 극강급. 정조와 논쟁 한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제대로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따르면 욕도 매우 찰지게 잘해서 주위 신하가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다만 이러한 몇몇 일화로 단순히 욕쟁이, 키보드 워리어 정도의 이미지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정조는 자신의 뛰어난 자질과 천재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 말 그대로 욕먹을 짓을 한 경우에만 한해서 욕을 퍼부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속이 시원한 소위 사이다 발언인 셈. 즉위 직후 치러진 신하들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빽으로 급제한 신하들의 답안지[* 처음에는 심지어 백지였고 이후에는 말도 안 되는 [[삼행시]]였다고 한다.]를 전국 관아에 뿌려서 개망신을 주었다.[* 실록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해당 내용의 정확한 출처를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이때가 정조의 춘추 스물넷이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의 춘추이다.] 다만 정조만이 유난히 뛰어난 키배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고 늘어지면서 반드시 이기는 것으로는 [[태종(조선)|태종]]이 조선 시대 최강급이었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세종]] 역시 말년에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거침없이 상대방을 갈구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주 좋은 예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만리]]를 비롯한 창제 반대 세력에게 신랄하게 디스를 한 것을 들 수 있다.] 거기에 [[영조]]는 실록에 '신하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라는 말이 여러 번 적힌 임금이다. 특히 [[숙종(조선)|숙종]], [[경종(조선)|경종]], [[영조]] 모두 화술에 능했다. 이쯤 되면 유전.[* 다만 '''논리적으로 독설을 날린 건''' 정조가 거의 유일무이하다. 나머지는 빡친 상태에서 걍 내뱉은 말 정도][* 앞서 본 이들의 절정은 영조다. 정승조차도 영조 48년엔 열번이나 갈아치울 정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는 좀 더 쪼잔해져서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에 임명시키면서 대놓고 '''"네 주제에 그런 중임을 할 수 있겠니?"'''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대사헌은 요즘으로 치면 검찰 총장에 대응하는 상당한 중책인데, 그런 자리에 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을 올린 걸 보면 마냥 쪼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불같은 면모는 할아버지 [[영조]]와 증조부 [[숙종(조선)|숙종]]에게서 잘(?) 물려받은 듯. 안타깝게도 정조의 아들 순조는 세도 정치에 휘둘렸다.[* 다만 순조도 자기 가족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변했다. 생모인 [[수빈 박씨|가순궁]]의 추숭과 상복 문제로 대간이 '그래도 후궁인데 예가 지나치다'고 비판하자 '입 닥치지 못하겠니?' 하면서 단칼에 씹어버렸고, 비판이 나오면 예는 정에서 나온다고 하며 [[공자]]의 어록까지 인용해가며 미친 듯이 깠다. 결국 상복을 3년 동안 입는 것까지 기어이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갔다.]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본인이 직접 자신의 [[질병]]에 처방을 했을 정도'''에다가, '''[[동의보감]]이 부실하다고 직접 보강을 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정조가 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대목.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한의사들 간 의견이 갈린다. 일부에선 처방이 과격하지만 효과는 볼 수 있는 극약 처방을 자주 했지, 크게 틀린 게 아니라고 하는 편과 반대로 격무에 시달리고 술을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게 잦은 정조에게 그러한 처방은 위험하다 정도로 나뉘는데, 이는 최후의 순간에 내린 처방과 연훈방 논란으로 이어진다. 헌데 이러한 과격한 처방은 [[허목]]에 연관된 일화에서 나오기도 한다. 때문에 '사약에 들어갈 만큼 극한 재료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당대에 유행이 아니었을까?'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실제로 사약의 재료 중에는 체질에 따라선 [[사약]]과 [[보약]]으로 나뉘는 경우가 있었다. ~~그냥 50:50의 도박.~~] 때문에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입장에선 연훈방 처방이 처음에 효과를 봐 두 번째로 시도할 때 누군가가 독을 넣어 연기에 독성을 띠게 했다는 것. 아무튼 정조가 의학을 공부한 것은 즉위 직후부터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어의에 의한 독살의 위협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으나 정작 정조 본인은 [[일득록]]에서 "대저 의학서라는 것은 옛 경서와 큰 차이가 없어 누구나 공부하고 익히면 쉽게 배울 수 있다."라고 서술했다. 한마디로 정조 본인은 단순히 잡기를 익히는 수준에서 공부하다 보니 의서에 정통하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 시대판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정조의 책을 읽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일단 정조는 책을 초록한 다음 다시 초록본을 읽으면서 원본과 대조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의견을 수렴한 다음 다시 재록을 하고 이걸 가지고 책을 완전히 외울 때까지 위 작업을 반복한다. 또한 자신의 무예 실력과 장용영의 특수성이 있었는지 몰라도 《[[무예도보통지]]》라는 종합 무예 서적을 발간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요즘도 조선 시대 군인의 복식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책을 바탕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이나 치러지는 행사도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